SPECIAL EFFECTS
'미디어'라는 이름을 향한 의문

월간미술 2002년 7월호 > exhibition theme

2002 미디어 아트 대전-뉴욕展

과학과 미술의 상호소통을 꾀하는 미디어 아트의 최신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2002 미디어 아트 대전-뉴욕 Special Effect전> (5.24∼7.7·대전시립미술관)은 뉴욕과 한국에서 활동하는 35명의 미디어 아티스트가 한자리에 모인 대규모 전시다. 무엇보다 디지털 테크놀러지가 현대미술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았던 휘트니미술관의 <BitStreams전>(2001)에 참여했던 작가가 참여하여 수준 높은 미디어 작품을 국내 관객에게 선보였다. 대전 현지 취재를 통해 21세기가 낳은 새로운 미술언어를 살펴본다.

미국 휘트니미술관의 현대미술 담당 큐레이터인 로렌스 린더(Lawrence Rinder)와 대전시립미술관의 박정구가 함께 기획한 <2002 미디어 아트 대전-뉴욕전>에는 미국·오스트리아·독일·영국·아이슬란드·이스라엘·콜롬비아 등 15명의 해외 작가들과 20명의 한국 작가들이 참여하여 전자영상매체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다양한 작품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전시를 보면서 나는 자연스레 지난해 말 같은 장소에서 열린 <미술에 담긴 과학전>과 재작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미디어_시티 서울 2000>의 <이스케이프전>에 출품되었던 작품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미디어 아트’라는 이름 아래 이처럼 다양한 작품과 시도를 한데 묶어 두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하는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그리고 아마도 미디어 아트를 표방하는 전시에 출품되는 대부분의 작품 역시 마찬가지로, 크게 보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즉 디지털 아트라 부를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편의상 ‘아날로그 아트’라 해두자) 두 가지다. 아날로그 아트에는 다시 비디오 영상으로 이루어진(또는 비디오 영상을 포함하는) 비디오 아트와 비(非)비디오 아트로 나눌 수 있다.

 

비디오 영상으로 이루어진 비디오 아트는 다시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싱글채널 비디오 영상으로 스크린이나 모니터를 통해 주어진 일정 시간에 걸쳐 감상해야 하는, 일종의 영화 같은 작품인데 ‘비디오영화 아트’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비디오프로젝션 아트’라 할 수 있는 것인데 특정한 오브제에 영상을 투사하는 작업이 이에 해당한다. 셋째는 ‘비디오오브제 아트’인데 이는 비디오 영상을 특수하게 작업하거나 설치한 모니터를 통해 보여 주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비디오영화 아트’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작품은 이릿 배츠리(Irit Batsry)의 <These are Not My Images>인데 이는 남부 인도의 풍경을 배경으로 한 85분짜리 35mm 본격 영화다. 이 작품에는 물론 여러 영화적 기법과 디지털 효과가 사용되고 있지만 이는 기존 영화에서 오래 전부터 사용되던 기법이기도 하다. 폴 파이퍼(Paul Pfeiffer)는 <Goethe’s Message to the New Negro>에서 프로 스포츠 경기의 중계방송 장면을 디지털 편집기로 조작하여 한 선수의 모습이 자연스레 다른 선수의 모습으로 계속 변형되는 장면을 만들어 냈다. 흑인 선수의 모습에 백인 선수의 모습이 겹치면서 자연스레 변해 가는 장면은 마이클 잭슨의 뮤직 비디오 <Black or White>의 마지막 부분을 연상시킨다. 이용백의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 <기화되는 것> 역시 이 부류에 속한다. 비록 이번 전시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매튜 바니의 <크리매스터> 시리즈 역시 이러한 ‘비디오영화 아트’에 속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비디오프로젝션 아트’에는 우선 김해민의 <RGB 칵테일>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단상에 놓인 칵테일 잔에 천장으로부터 비디오 화면을 투사한 것이다. 예쁜 빛의 칵테일 잔에 탄산가스가 섞인 음료가 들어간 듯 부글부글 거품이 일기도 하고 인물을 비롯한 여러 영상이 칵테일 잔에 담겨 지나간다. 문주의 <동풍>은 관객을 향해 강한 바람을 일으키는 커다란 선풍기에 바다 풍경 등의 비디오 화면을 투사한 것이다. 관객은 마치 바다에서 불어 오는 바람을 마주하는 듯한 시원한 착각에 잠시나마 사로잡히게 된다. 이윰의 <루아흐 ‘바람의 순간’> 역시 천장에 길게 드리워진 하얀 천 위에 비디오 영상을 투사한 것인데 사운드와 영상의 조화가 돋보였다.

‘비디오프로젝션 아트’의 새로운 가능성과 함께 높은 완성도를 보여 주는 것은 폴 카이저와 쉘리 에쉬커(Paul Kaiser & Shelley Eshkar)의 <보행자(Pedestrian)>라는 작품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바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자그마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바닥에는 모래가 깔려 있고 천장에서 비디오 프로젝션으로 모션 캡처 소프트웨어를 통해 창조된 자그마한 인물의 이미지가 투사되는 것이지만 전시장 바닥의 모래는 마치 투사된 비디오 화면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자그마한 인물들은 도심 거리·어두운 거리·광장·공원 등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서로 만나서 잡담을 나누기도 하고 어둠 속을 손전등 하나를 들고 헤매기도 한다. 관객의 시점은 하늘 위에서 자그마한 인물이 사는 세상을 내려다보는 신의 관점이다. 때론 마치 구름을 타고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관객의 관점도 변한다.

‘비디오오브제 아트’ 부문의 선구자는 역시 백남준이다. 이번 전시의 참여작가는 아니지만 전시장 입구 한복판에는 역시 그의 작품이 박물관 소장품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 부문에서 눈에 띄는 작품은 양만기의 <접촉/전염성 프로젝트>다. 커다란 현악기에 LCD비디오 화면을 옆에 달고 스피커를 악기 안에 넣어 놓은 것인데 관객이 악기의 현에 손가락을 갖다 대면 일정한 소리가 난다. 네 줄의 현마다 서로 다른 소리가 나기 때문에 관객들은 신기해하며 한 줄 한 줄 조심스레 만져 보게 마련이다. 육태진의 〈거울>은 오래 된 문갑의 거울 부분에 LCD화면을 달아 놓아 거울에 관객의 모습 대신 다른 사람의 모습이 비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문갑의 작은 서랍에는 먼지가 덮여 있는데 그 속에서는 새가 하늘을 날고 있다. 짐 캠벨(Jim Campbell)의 <5th Avenue Cutaway> 연작은 비디오 이미지를 768개의 LED 라이트의 디지털 배열로 전환하여 흐릿하고도 불분명한 혹은 단순하고도 추상적인 영상으로 재구성해 낸 것인데 역시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미디어 아트라는 용어는 폐기처분되어야

이제 ‘비(非)비디오 아트’에 속하는 작품을 살펴보자. 먼저 어윈 레들(Erwin Redl)의 〈매트릭스 II>를 들 수 있는데, 수천 개의 녹색 발광소자(light-emitting diodes)를 어두운 방 안에 일정한 간격으로 가느다란 줄에 매달아 둔 작품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비현실적인 3차원 공간에 들어선 듯한 또는 스타워즈 영화의 한 장면으로 빨려 들어간 듯한 느낌을 준다.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무한한 우주공간을 유영하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전혀 새로운 공간과 시각을 체험하게 한다. 레들은 컴퓨터 화면에 나타나는 영상도 빛에 불과한 것이며 어떠한 오브제도 없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그는 조각 같은 오브제 미술에는 관심이 없으며 빛 그 자체에 관심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레들은 빛 그 자체를 다루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며 단지 빛을 내는 오브제, 즉 발광소재를 아주 능숙하게 다루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칼 퍼지(Carl Fudge)의 <Rhapsody Spray> 연작이나 <Mobile Suit> 연작은 각각 일본 만화 <세일러 문>과 <건담>의 캐릭터를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변형시키고 이를 실크스크린으로 찍어 낸 것이다. 작업 과정은 디지털적이지만 완성되어 나온 작품은 대단히 전통적인 판화다. 작품 생산 과정에서는 컴퓨터가 이용되었겠지만 작품 자체에는 어떠한 전자매체도 사용되고 있지 않다. 이러한 특징은 강홍구의 <물고기가 있는 풍경>에서도 발견된다. 여러 풍경 사진 속에 디지털 작업으로 입혀 넣은 듯한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물고기가 한 마리씩 누워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작업 과정에는 컴퓨터가 사용되었으나 작품 자체는 전통적인 아날로그 매체인 사진이다.

역시 같은 ‘비(非)비디오 아트’로 분류할 수 있으나 로버트 라자리니(Robert Lazzarini)의 작업은 대단히 독특하다. 그는 해골이나 망치와 같은 오브제를 컴퓨터로 스캔하여 3D 이미지로 저장한다. 그리고 이 3D 이미지를 컴퓨터로 왜곡하여 뒤틀린 형태를 만들고는 이것을 물리적 사물로 찍어 낸다. 물론 재생하는 데 사용되는 물질은 원래 사물을 이뤘던 물질이다. 뒤틀린 해골은 실제 뼛가루로 만든다는 식이다. 도식화하자면 ‘사물→디지털 이미지→변형된 이미지→변형된 사물’의 순서를 거친다. 그의 〈망치(Hammers)>나 <해골(Skull)>은 물질화된 디지털 이미지이며 디지털적 존재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사물의 디지털화와 디지털 정보의 물질화라는 디지털 기술의 궁극적인 발전 방향을 암시하는 뜻 깊은 작업이다. 뒤틀려 있는 해골이나 망치는 이미 우리가 갖고 있는 해골이나 망치의 원형에서 많이 벗어나 있으며 일상생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작품을 보자마자 그것이 해골이고 망치임을 알아챈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

이제 ‘디지털 아트’를 살펴보자. 이는 흔히 소프트웨어 아트로 불리기도 하는데 한마디로 컴퓨터 파일 상태로 존재하는 작품을 일컫는다. 요즈음의 ‘디지털 아트’는 흔히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즈나 웹에서 구현되는데 관객들이 마우스로 컴퓨터를 조작함으로써 일정한 시각-청각적 경험을 하게 하는 상호작용성을 지닌다. 이번 전시에서 골란 레빈(Golan Levin)의 작품은 이러한 디지털 아트의 전형을 보여 준다. <Qwerms>에서는 관객이 클릭하면 귀여운 벌레 같기도 하고 해마 같기도 한 생명체(?)가 생겨난다. 클릭한 것을 잡아 끌면(drag) 잡아 끄는 만큼 기다란 벌레가 탄생한다. <모구(毛球·Floccus)>에서는 관객이 클릭하면 포인터 끝부분으로 머리카락 같은 가느다란 실이 몰려든다. 마우스를 계속 누르고 있으면 더 많은 실이 몰려든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인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러한 ‘디지털 아트’의 가장 큰 특징은 원본과 복사본의 구별이 없다는 점이다. 사실 골란 레빈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 굳이 미술관까지 갈 필요는 없다. 작가가 컴퓨터 파일 상태로 된 그의 작품을 이메일로 보내 준다면 집에 편히 앉아 내 컴퓨터를 통해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나는 작가 작품의 ‘복사본’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원본이라 해야 한다. 완전복제가 가능한 디지털 정보의 특성상 작가가 갖고 있는 파일이 원본이고 내게 보내 준 파일은 복사본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작가가 그의 작품을 웹사이트에 올려 놓고 원하는 사람 아무나 다운로드를 받을 수 있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골란 레빈의 ‘진품’을 ‘소장’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내 컴퓨터의 성능이 더 좋고 모니터가 더 선명하다면 나는 작가보다 더 완벽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디지털 아트’는 이제 인터넷과 같은 컴퓨터 네트워크에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에 인터넷에 존재하는 훌륭한 많은 작품 중 한 두 개는 포함시켰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뉴미디어 아트의 장래는 콘텐츠에 달려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 다른 종류의 작품을 한데 뭉뚱그려 막연히 ‘미디어 아트’라 불러 온 것이다. 이제 ‘미디어 아트’라는 막연하고도 부정확한 용어는 폐기처분되어야 한다. 혼란만 가져오기 때문이다. ‘미디어 아트’라는 말은 그 자체로서 형용 모순이다. 매체가 없는 미술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디어 아트’와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유화를 생각해 보자. 유화물감이나 캔버스도 분명 미디어다. 그냥 미디어인 정도가 아니라 한때는 ‘뉴미디어’였다. 우리가 사용하는 지금의 유화가 개발되기 전에는 달걀 노른자에 안료가루를 이겨서 나무판에 그림을 그리는 템페라화가 대부분이었다. 템페라는 빨리 굳기 때문에 빠르고 정확하게 그려야 했다. 새로운 매체인 유화물감은 15세기에 플랑드르의 화가 얀 반 아이크가 개발했다. 그는 아마씨 기름에 안료를 섞어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는데 캔버스라는 ‘뉴미디어’ 역시 나무보다 착색 효과가 뛰어났다. 기름은 천천히 말랐기 때문에 수정 보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고 정물화의 미세한 세부 묘사나 풍경화의 원경 묘사가 가능해졌던 것이다. 플랑드르 화파 특유의 사실주의적 그림은 유화물감과 캔버스라는 ‘뉴미디어’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한편 새로운 매체는 새로운 제도적 변화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유화와 캔버스를 얻은 화가들은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초상화를 쉽게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교회의 벽화 그리기 외에도 다양한 수입원을 얻을 수 있게 된 화가들은 교회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종교 이외에도 다양한 소재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1824년 주석튜브라는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고 휴대하기 편리한 튜브형 유화물감이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화가들은 이젤과 휴대용 캔버스를 들고 실내 작업실을 벗어나 야외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새로운 매체나 기술 개발은 미술계 전반에 걸쳐 제도적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 우리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것은 ‘소프트웨어 아트’ 또는 ‘넷아트’로 불리는 디지털 아트다. 시간이 흐르면 조만간 디지털 매체를 사용하는 미술과 그렇지 않은 미술로 나뉠 것이고 결국엔 디지털 아트가 주류를 이루게 될 것이다. 마치 유화가 템페라화를 몰아낸 것처럼. 그리고 디지털 매체는 미술 전반에 걸쳐 유화물감의 발명이 가져온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커다랗고 근본적인 제도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진정한 의미의 디지털 아트는 특정한 전시장이라는 하나의 장소에 소속되어 있을 필요는 없다. 내가 좋아하는 연속극이나 웹사이트를 보기 위해 반드시 특정한 장소에 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저 잘 나오는 텔레비전이나 성능 좋은 컴퓨터만 있으면 아무데나 가도 좋은 것이다. 이제 문제는 그러한 미디어가 실어 나를 내용이다. 미술은 이제 미디어의 문제가 아니라 콘텐츠의 문제다. ■

 
  위 : 수파티스트 <W.C. 아트숍>
아래 : 제2전시실 전경. 한수정<그림자로 보기> 공동작업 <이미지드링크 자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