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에서 사물로, 사물에서 작품으로

Art in culture 2002년 5월호 > Focus

이수경展 3.12 - 4.20 쌈지 스페이스

<꽃/그림/도자기>라 명명된 이수경의 이번 전시는 3개의 작은 전시를 한데 모아 놓은 것이다. 3층의 메인 갤러리에 들어서는 순간 관객들의 표정은 대부분 저절로 밝아진다.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은>이라는 제목의 이 전시장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하다. 유럽스타일의 명품 꽃꽂이 전문 업체인 크리스챤 토르투의 협찬으로 보통 수십에서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최고급 장식용 꽃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최상류층의 파티나 중요한 행사에 씌여지는 것으로 유명한 크리스챤 토르투의 꽃다발들은 멋진 장식용 꽃이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을 꾸미기 위해 존재하는 일종의 도구다. 크리스마스가 지났을 때 혹은 결혼식이 끝났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아무런 소용도 없다. 하지만 이수경의 작품이 되어버림으로써 이 꽃들은 다른 어떤 것을 꾸미기 위해 존재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는 “작품”이 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자연물만이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인공물은 일정한 목적을 지닌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 자연물이었던 이 꽃들은 크리스챤 토르투에 의해 꽃꽂이라는 인공물로 잡혀 왔다가는 다시 이수경에 의해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는 자연물로 해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전시장에 도착했을 때 꽃들은 이미 시들어 있었고, 바닥에 깔려 있는 이끼 위에는 여기저기 썩은 사과들이 뒹굴고 있었으며,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는 장미꽃들은 이미 말라버려 드라이플라워가 되어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 시들어 버린 꽃을 새 꽃으로 갈아준다고 하는데 나는 그만 새 꽃이 들어오기 바로 전날 전시장을 방문했던 것이다. 나는 분명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이다. 하지만 시들어 버린 꽃과 썩은 사과들은 묘한 편안함을 주고 있었는데 그것은 전시장에서 울려 퍼지고 있던 <이수경의 꽃을 위한>이라는 김형태의 컴퓨터 음악과도 아주 잘 어울렸다.

꽃 · 그림 · 도자기, 3색의 즐거움

2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바닥에 온통 수북이 쌓여 있는 도자기 파편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깨진 도자기들은 도예가 항산 임항택의 공방에서 수거한 쓰레기다. 바닥에 깔린 도자기 파편을 배경으로 해서 누더기 깁듯이 조각조각 이어 붙여 만들어진 불규칙적인 모양의 항아리가 전시장 가운데 누워있다. 마치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깨진 도자기 조각들이 스스로 테이블로 올라와 서로 엉겨 붙은 듯한 느낌이다. 비록 누더기 도자기지만 물을 담아 꽃꽂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빈틈없이 이어 붙였기에 항아리로서의 기능도 충분히 수행한다. 그런데 이 항아리는 이제 다시는 결코 깨질 수 없는 도자기다. 자신을 이 세상에 만들어 낸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아 이미 한 번 산산이 부서져 본 경험이 있는 저 도자기 조각들은 이제 더 이상 깨어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누가 다시 집어 던져 부서진다하더라도 다시 이어 붙이면 그만이니까. 이 울퉁불퉁한 도자기에게는 자신의 상처인 접합 부위가 그래서 오히려 자랑스럽다. 접합 부위를 결코 슬쩍 감추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금박을 입혀 “바로 이 지점이 이어붙인 곳”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아마도 이들은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토기 이래 깨지고 금간 것이 자랑스러운 첫 항아리일 것이다.

재생 도자기 옆에 놓인 것은 <번역된 도자기>다. 작가는 이태리 알비솔라라는 도시에서 그 지역의 도자기 공장에 있는 도공에게 조선의 도자기에 대한 설화와 백자를 묘사한 시를 들려주고 또 조선 백자 사진을 보여 준 뒤, 조선 백자 스타일의 도자기 12점을 제작하도록 했다. 이 과정은 비물질인 텍스트 (설화, 백자부)가 도자기로 사물화(embodiment)되는 과정이며 (따라서 현대 미술의 유행어인 “비물질화”의 반대 방향이다), 한국의 도자기 문화가 이태리 도공의 손을 빌어 재현되는 물질적 번역 과정이다.

1층 주차장의 전시는 <탈신체(脫身體)의 여행을 위한 그림>이다. 작가가 삼각지 그림 가게에서 산 이발소 그림을 둘로 나누고 그 사이를 띠처럼 길게 늘여서 그렸다. 액자 밑에 손잡이를 달아 작품의 길이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게도 하였다. 사실 잡아늘인 것 같기도 하고 왼쪽 부분의 이미지가 순간적으로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나의 이미지를 둘로 쪼개 길게 늘인 부분에서는 일상적인 시간이나 공간의 개념이 증발해버린다. 그림의 쪼개진 바로 그 부분이 선택되어 길게 늘어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그 그림의 다른 어느 부분이라도 다시 또 선택되어 쪼개지고 길게 늘어날 수 있었다. 결국 하나의 그림은 무한히 연장되고 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것이 되며, 그것은 특정한 공간 내에 위치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영겁의 이미지가 된다. 그림에서 늘어난 것은 공간적인 확장임에도 불구하고 늘여진 부분을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떤 특정한 순간이 한없이 지속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멈춰버린 찰나에 영원히 머물러 있는 듯한 그 느낌은 비디오 인스톨레이션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한없이 늘어지는 듯한 <아-우-움> “소리 명상”에 의해 강화된다.

이수경의 이번 전시를 이루는 작업의 공통점은 이미 나름대로 하나의 “작품”인 꽃꽂이, 도자기, 이발소 그림 등을 가져다가 그것을 재료로 하여 전혀 새로운 작품을 생산해냈다는 사실이다. 꽃이라는 자연물을 재료로 삼아 하나의 작품을 만든 것이 크리스챤 토르투의 꽃다발이며 그러한 작품을 다시 재료로 삼아 2차적 작품을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이 이수경의 작업이다. 이발소 그림을 가져다가, 깨진 도자기 조각을 가져다가, 심지어 이태리 도예공의 작업 환경을 통째로 빌어다가 조선 백자를 새롭게 번역해내는 등의 과정은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신화의 생산과정과 동일하다.

바르트에 의하면 일정한 기호나 작품이 신화가 되기 위해서는 ‘메타 언어’가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하나의 작품이 다시 또 다른 작품의 재료가 되어 2차적 작품을 생산해내야만 한다. 바르트는 일차적 기호를 대상적 언어 (langage-objet)라고 하며 그 대상적 언어에 기반하는 2차적 언어를 메타 언어 (meta-langage)라 부른다. 이렇게 볼 때, 다른 사람의 작업을 원료 삼아, 또는 아예 다른 사람을 도구 삼아서 하는 이수경의 작품들은 자신 안에 대상적 언어와 메타 언어를 모두 포괄하는 신화이며, 대상적 언어에 기반하는 메타 언어라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퍼포먼스나 옷이나 꽃, 그리고 텍스트를 이용한 과거의 작업들과 이번 전시에 이르기까지 이수경의 작업에는 분명히 일관된 표정이 있다. 그것은 웃는 얼굴이다. 심각함이나 무거움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경박함이나 가벼움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미소는 성실함을 바탕으로 한 자신감 있는 미소다. 온갖 고정관념과 답답함을 슬쩍 밀쳐 버림으로써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그의 미소를 앞으로의 작업에서도 계속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

 
  위 : 수파티스트 <W.C. 아트숍>
아래 : 제2전시실 전경. 한수정<그림자로 보기> 공동작업 <이미지드링크 자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