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성에 관한 미술이론가 20인의 발언

월간미술 2002년 2월호 > Special Feature > 한국 현대미술의 근원과 정체성

《월간미술》은 지난 2000년 8월호 특집기사 <문화예술인 47인이 바라보는 한국미의 본질>을 통해 ‘韓國美’에 대한 근원을 살펴본 바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번에는 ‘현대미술’ 속에 잠재되어있는 미의식의 근원과 그 정체성을 밝혀보고자 국내 권위 있는 미술이론가를 대상으로 앙케트를 실시했다.

한국 현대미술의 기점과 미의식의 근원, 특징, 그리고 대표작가 등과 관련된 다섯 가지 문항에 걸쳐 의견을 구한 이번 설문조사에는 최종 20명이 답변을 보내왔다. ‘한국 현대미술의 근원과 정체성’에 관한 논의는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그 정의와 개념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논의는 매우 민감한 사항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문에 응한 미술이론가들은 나름대로의 입장과 시각에서 소신 있는 해석을 피력했다.

《월간미술》은 이번 설문조사를 계기로 앞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근원과 정체성’에 대한 보다 심도있고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설문의 응답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강선학(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강홍구(작가) 김미경(강남대 교수) 김영순(세종대학교 겸임교수) 김정희(미술사) 김주환(연세대 교수) 김찬동(문예진흥원 미술회관 문학미술팀장) 김형숙(미술사) 박영택(경기대 교수) 박일호(대전시립미술관 관장) 송미숙(경개대 교수) 심상용(동덕여대 교수) 윤용이(명지대 교수) 윤진섭(호남대 교수) 이영욱(전주대 교수) 정영목(서울대 교수) 정준모(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조광석(경기대 교수) 진휘연(SADI 교수) 최열(미술비평)(이상 20명 가나다순)

1. 근대기를 거치면서 이른바 한국적 모더니즘이라 일컬어지는 한국현대미술의 기점에 관한 의견이 분분하다. 구체적인 작가나 그룹, 전시, 사건 등을 예로 들어 본격적인 한국 현대미술의 기점에 대한 의견을 말해 달라.

"한국"현대미술의 기점은 "한국" 즉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적 단위가 시작된 1948년 정부수립이라 해야만 할 것이다. "한국현대미술"은 미술적 특징에 따른 개념 정의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정치적 단위를 선험적으로 받아들인 후에 그에 맞는 미술적 특징을 우격다짐 식으로 찾으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현대미술"은 이미 정치적 개념이며 따라서 이를 미술적 사건인 "구체적인 작가나 그룹의 전시"등을 통해서 그 기점을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2. 서구 논리의 수용과정에서 우리의 전통적 미의식과 가치가 무너지고 잊혀지는 현실이다. 또한 서구미술을 따라가는 것이 세계화로 인식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 미술의 상황에서 서구미술과 구별되는 한국현대미술의 특징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전통적 미의식과 가치가 무너지고 잊혀지는" 것은 우리만의 현실이 아니다. 서구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전통적 미의식과 가치가 무너지고 있음을 개탄하고 있다. "서구논리"에도 전통이 있고 현대가 있다. "서구의 미의식" 역시 고정적인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전통적인 미의식은 서구에 꼭 대비되는 것도 아니고 서구논리때문에 무너진 것도 아니다. 전통적 미의식의 몰락은 독점자본주의와 상품경제의 전세계적 확산때문이며 거기에는 동서양의 구분이 없다.
이 질문은 또한 "서구미술과 구별되는 한국현대미술의 특징"을 묻고 있다. 왜 한국미술이 서구미술과 "대립"해야 하는가? 서구 미술과 구별되는 동양미술의 특징이라면 또 몰라도 왜 하필이면 서구미술 대 한국현대미술인가? 서구미술에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한국현대미술의 특징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일본현대미술에도 그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을 것이고 중국현대미술도 그럴 것이다. 필리핀미술은?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태국, 스리랑카는, 몽고는? 대만은 어떤가? 홍콩은? 홍콩은 이제 중국에 흡수되었으니까 따질 필요가 없는가? 인구 13억의 중국이나 3천만의 북한도 모두 하나의 국가이니까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현대미술"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해야 하는가? 왜 자꾸 정치의 우연한 산물인 "국경"과 "국가"라는 단위를 통해 미술을 특징지우려 하는가?

3. 전통과 현대의 계승문제와 관련해 한국 전통미술과 현대미술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미의식의 근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삼국시대, 고려, 조선을 관통하는 미의식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고 그것이 한국(남한)현대미술에도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면 그것은 북한현대미술에서도 발견될 수 있어야 이치에 맞는다. 따라서 한국전통미술과 현대미술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미의식은 현대북한미술과 남한미술의 공통분모일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현대미술과 남한의 현대미술사이에 존재하는 공통된 미의식이 무엇인지 필자는 잘 모른다.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남한의 현대미술은 대만과 일본의 그것과 가깝지 북한과 더 가깝지 않다. 북한 미술은 오히려 중국미술과 비슷해 보인다.

4. 지금은 한국 현대미술의 원로가 된 7,80대 작가들이 활동하던 50여 년 전 상황과 2,30대 동시대 젊은 작가의 감수성엔 많은 차이가 있을 듯 하다. 만약 그렇다면 과거와 현재의 젊은 작가를 비교해 이 두 세대간에 흐르고 있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들어 한국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의견을 말해달라.

"한국미술의 정체성"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필요도 없고, 또 그런 것을 찾으려 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품이 좋으면 그만이지 왜 거기서 꼭 "한국적"인 것을 찾아야 하는가? 호남출신 작가의 작품에서는 호남의 정체성을, 경상도 출신 작가의 작품에서는 경상도적인 어떤 것을 찾아야 하는가? 또 왜 하필이면 "한국(남한)적인" 것인가? 왜 아시아적인 것은 찾지 않는가? "한국 (남한)"이라는 것은 20세기에 한반도 사는 사람들이 우연히 갖게 된 정치적인 단위에 불과한 것이며 거기에는 미술에 필연적으로 연관성을 갖는 어떠한 사실도 없으며 또 있어서도 안된다. "한국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추구는 일종의 확대된 패거리주의이며, 쇼비니즘적 자기종족우월주의의 발로이다.

5. ‘한국적’이라는 개념의 정의와 함께 가장 ‘한국적인’ 현대미술가와 작품을 선정하고 이에 대한 선정배경을 밝혀달라.

"한국적인 현대미술"이라는 말 자체가 형용모순이라 생각한다. "한국적 현대미술"이라는 개념이 성립하려면 한국 내의 여러 작가들의 차이는 다른 나라의 작가들과의 차이보다 작아야 한다. 즉 한국의 작가 A, B, C의 차이는 다른 나라의 작가 X, Y, Z 들과 차이보다는 작아야 한다. 만약 한국 작가 A 와 C의 차이가 A와 Z와의 차이보다 더 크다면 "한국적인 현대미술"이라는 개념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오늘날 한국에서 (또는 한국 밖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은 너무도 다양해서 다른 나라의 작가들과 구별되는 어떠한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분명 한국작가의 작품이다"라고 말해주는 공통된 어떠한 특징도 한국작가들의 작품은 공유하고 있지 않다고 본다. 많은 한국의 작가들은 이미 모든 의미에서 세계적이다. 그들은 한국현대미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작품활동을 할 뿐이고 현대에 살고 있으니까 현대미술을 할 뿐인 것이다.

게다가 "한국적인 현대미술"의 존재를 인정하려면 그와 비슷한 단위인 일본의 현대미술, 중국, 대만, 태국, 말레이지아, 베트남 등등의 현대미술의 존재도 인정해야 한다. 여기서 그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말은 그저 베트남에서도 일군의 작가들이 현대미술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의 작가들이 예컨대 "베트남현대미술"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특징적인 경향을 보이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그러한 특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존재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찾기 위해 탐구할 필요는 더욱 없다고 생각한다. 민족국가는 이제 폐기해야 될 낡은 개념이다. 한국적 현대미술이라는 개념도 이제는 제발 더 이상 논의조차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굳이 세계화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제는 그냥 작품이 좋으냐 아니냐만 따지자. 조수미의 오페라 아리아를 들으면서도 그 안에서 한국적인 어떤 것을 따지는 식의 국수주의는 이제 제발 그만 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