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인간, 가상생명의 신개념 인터랙티비티

월간미술 2001년 11월호 > Sight & Issue

<Trialogue(삼자대면)展>(10.12∼11.15, 아트센터나비)은 자연·인간·가상생명의 삼자대면을 위한 장을 마련하고, 디지털 프로세스에 의한 음악적·시각적 상호작용을 통해 새롭고 의미 있는 관계를 모색하는 전시다. 시각예술가·인터페이스 디자이너·컴퓨터 음악 작곡가·엔지니어·큐레이터의 상호협력으로 진행된 신개념 인터랙티브 전시의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환한 어항 속을 헤엄쳐 다니는 노란색 열대어다. 전체적으로 어두침침한 전시장 안에 부분적으로 환한 조명이 비치는 어항 속을 헤엄치는 밝은 원색의 물고기는 마치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물고기처럼 보인다. 반면 커다란 스크린 위에서 기괴한 모습으로 움직이는 가상생명체는 오히려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항 양옆에는 LCD 화면 두 개가 어항 안쪽을 향해 있다. 한쪽 화면에는 관객이 생산해 내는 이미지가 펼쳐지고 다른 한쪽에는 가상생명체가 생산해 내는 영상이 나타난다.

전시광경. 자연을 상징하는 물고기(Au), 작가와 관객을 포함한 인간(Hau), 학습능력을 가진 가상생명체(Vau)가 등장하여 각 주체가 소리와 이미지를 생성하는 예술적 상황을 연출한다. 여기에서 'Au·Hau·Vau'등은 마치 사람이 태어나면 이름을 지어 주듯이 작가가 지어준 고유명사로 기능한다. 예를 들면 'Au'는 '漁(물고기)'에서 유추한 이름이다.

물고기는 계속 변해 가는 화면에 반응하여 (아마도) 자기가 좋아하는 화면이 나타나는 쪽으로 헤엄쳐 간다. 물고기의 이러한 움직임은 어항 정면에 놓여 있는 작은 카메라를 통해 입력된다. 끊임없이 변하는 물고기의 위치는 어항 뒤에 놓여 있는 커다란 스크린에 영상과 전시장 전체에 울려 퍼지는 음악으로 나타난다.

어항 오른편에는 공상과학영화의 우주선에나 나옴직한 투명한 아크릴 기둥 세 개가 허리높이만큼 서 있고 그 위로는 환한 부분조명이 비치고 있다. 투명한 아크릴 기둥 위에는 광센서가 들어 있어 사람이 손을 움직이면 일정한 신호가 입력되어 가상생명체와 물고기에게 전달된다. 관객의 손의 움직임은 광센서에 의해 광량의 변화로 시스템에 입력되고 이것은 각각 시각적 요소를 변화시키는 신호(signal)와 음악적 요소를 변화시키는 신호로 변환된다. 이를 위해 이 작품의 기획자이며 미술작가이자 공학도인 이준은 CPU 보드를 자체 설계하여 제작하였다. 이 인터페이스는 보드당 33개의 아날로그 센서 입력을 디지털로 처리할 수 있는 두 개의 CPU 보드로 구성되는데, 그중 하나는 가상생명체인 '보(Vau)'의 세 가지 시각적·음악적 기질을 조정하는 입력통로로 사용되고, 다른 하나는 순수한 음악적 상호작용을 위한 입력통로로 사용된다.

가상생명체인 '보'는 3D 엔진에 의해 통제되는 여러 가지 기질을 지니고 있다. 처음 태어났을 때는 호두알 같다가 자라면서 점차 부드럽거나 딱딱하게 변하기도 하고, 털이 자라나기도 하는데 털은 길이와 중력의 방향에 따라 쭈뼛해지기도 하고 축 늘어지기도 한다. 또한 투명해지거나 불투명해지기도 하고, 기분 좋은 상태는 푸른색으로, 기분이 언짢아지면 붉은색으로 변한다. 한편 가상생명체 역시 컴퓨터에 미리 입력되어 있는 수많은 영상에서 하나를 임의로 뽑아서 변형시킴으로써 자신만의 영상을 생산해 낸다.

컴퓨터 공학도·음악가·미술작가 등 12명이 함께 작업하여 만들어 낸 <Trialogue>는 물고기·관객·가상생명체가 각각 평등하게 상호주관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시스템이다. 각각의 행위자는 어느 하나도 다른 것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다. 다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전체 시스템을 이룰 뿐이다.

<Trialogue>에서 관객의 역할은 이중적이다. 우선 관객은 물고기, 가상생명체와 동등하게 트라이얼로그라는 시스템의 일부가 된다. 동시에 그러한 시스템을 이루는 순환고리로부터 의식적으로 뛰쳐나와 전체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바라보기'는 단순히 관객(spectator) 되기와는 전혀 다르다.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버린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므로 현상학적 판단중지(epoche)에 가까운 반성적 사유의 힘이 요구된다. 또한 이 작품은 모든 중요한 것(존재·진리·힘)은 상호주관적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상호주관적 작용을 일종의 '대화'로 파악하여 'Trialogue(셋의 대화)'라 명명한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은 아무도 그 대화의 내용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내용이 말하는 사람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되는 상황은 독백(monologue)이지 대화(dialogue)가 아니다. 또 대화에서는 발화되는 내용이 발화된 이후에야 비로소 확정된다는 즉흥성(improvisation)이 있다. 우리가 대화에 참여하는 것은 재즈 연주자가 재즈를 연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본적인 주제와 내용에 대한 막연한 생각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그러한 의도와 뜻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단어를 어떻게 배열하느냐가 행위(performance)의 순간에 결정된다. 그러한 즉흥성의 상황은 <Trialogue>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관객과 작품 간의 상호작용성을 지향하는 작품은 무수히 만들어졌다. 게리 힐이나 제프리 쇼의 여러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난해 아트센터나비에서 전시되었던 나오코 토사의 <무의식의 흐름>도 관객의 참여를 필요로 하는 상호작용적인 작품이다. 기존의 상호작용적 작품은 관객의 '선택'과 '행위'에 따라 즉각적으로 (또는 일정하게) 미리 프로그램된 내용이 관객에게 주어질 뿐이며 따라서 관객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경험을 선택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Trialogue>는 기존의 상호작용적 작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터랙티브 아트의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관객은 다른 두 행위자인 물고기와 가상생명체와 동등한 처지에 놓인다. 이 시스템에서는 관객이 주체(subject)이니만큼 물고기와 가상생명체도 주체다. 관객의 움직임이 작품의 내용을 변화시킬 수 있는 만큼 물고기와 가상생명체도 나름대로 작품의 내용을 변화시킨다. 다시 말해서 관객은 물고기나 가상생명체 이상의 통제력을 주장할 수 없다.

기존의 인터랙티브 아트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반응이 즉각적으로 일어나지도 않고 또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러한 반응이 반드시 일정하지도 않다는 사실에 상당한 어색함과 불편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불편함이야말로 인간이 오만하다는 증거다. 이러한 불편함은 상황(작품)을 항상 우리가 전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인간의 오만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Trialogue>는 인간 역시 전체 시스템의 일부이며 다른 개체에 영향을 주는 것만큼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교훈적인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