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

월간미술 2001년 8월호 > Special Feature > 21세기 미술의 키워드

우리 사회는 아직도 근엄하고 엄숙함만을 존중하며 웃음에 대해서는 존중할 줄 모른다. 웃음에 대해서만큼은 아직도 중세를 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한국에서 ‘수준 낮음’이란 이성주의에 대한 신봉의 결과물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웃음과 가벼움에 대한 감수성의 문화적 변혁은 어쩌면 21세기 미술이 담당해야 할 문화적 소명인지도 모른다.최근 무거움과 진지함을 조롱하고 웃음을 소재로 하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웃음과 가벼움’이 21세기 미술의 키워드로 자리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고, 웃음과 가벼움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의 지평을 열어 가고 있다.

21세기 이후의 미술이 그 전시대와 뚜렷이 구분되는 특징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웃음과 가벼움이길 바란다. 진지하고 무거운 모습에는 폭력의 그림자가 서려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권위주의에 찌든 중세 유럽의 얼굴은 어둡고 심각했으며, 르네상스 이후 근대에 들어서도 종교를 대체한 과학적 이성주의의 얼굴 역시 마찬가지로 진지하고 무거웠다. 종교나 과학적 이성주의의 공통점은 자신의 진리에 대해 지나친 신념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나 과학, 그리고 대부분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항상 진리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 이 믿음은 자기 자신의 진리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항상 폭력과 억압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인간만이 자신의 믿음에 기반하여 다른 인간을 자신있게 죽일 수 있는 존재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의 윌리엄 수도사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조심하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가 웃게 하는 일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리가 아니겠는가?”

자신이 믿는 진리에 대해 결코 회의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거룩하고 고상한 것을 숭배하며, 엄숙하고 심각한 얼굴로 역사와 이데올로기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모두 잠재적 폭력자다. 이들은 대개 인간의 본성이 몸이 아니라 정신에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자신의 이상과 이데올로기, 신념을 위해서는 몸 정도는 과감히 버려도 좋다는 식의 왜곡된 가치관을 지니게 마련이다.
예컨대 국기에 대한 맹세에서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념과 이데올로기의 대상에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하는’식의 전도된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지니게 된다. 국가라는 조직은 사람들이 잘먹고 잘살기 위해 낸 일종의 도구이며 결코 그것이 목적은 아니다. 따라서 국가가 국민의 몸과 마음을 위해 존재해야지 그 반대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의 죽음 이후 가치기준의 혼란이 심화되었다고 하지만 몸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최후의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적 신념도, 거룩한 애국심도, 엄숙한 역사관도 아니다. 바로 우리의 몸이다. 몸에 좋은 것이 좋은 것이고 몸에 나쁜 것이 나쁜 것이다. 모든 것은 인간의 몸을 위해 봉사해야 하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핵무기, 환경 공해, 폭력, 전쟁, 지뢰, 총기, 교통사고, 비합리적인 의료 서비스 등은 우리 몸에 해롭기 때문에 나쁜 것이고 없애야 할 것들이다.
우리의 몸이 편안하려면 세상이 평화로워야 한다. 웃음에 대한 존중과 우리 삶의 덧없음과 가벼움에 대한 인식은 세상을 좀더 평화롭게 할 것이다.

 
최정화<So far so good>
플라스틱 조명
 

미하일 바흐친은 “모든 위대한 것에는 반드시 웃음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웃음 없이 심각한 얼굴로 하는 모든 이야기를 두려워해야 한다. 바흐친의 말대로 폭력의 가장 큰 특징은 “웃음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흐친이 이야기하는 웃음은 ‘웃는 웃음(laughing laugh)’이며, 즐겁고 환한 열린 웃음이다.
이것은 냉소적이고 부정적이며 닫혀 있는 비웃음과는 다르다. 비웃음은 비(非)웃음이다. 정화열은 “심각함과는 달리 웃음은 우리를 고양시키며 해방시킨다. 바흐친이 옹호하는 웃음은 모든 사람과 전체 세계에 울려 퍼지는 사회적이면서 함께 합창하는 형태의 웃음이다. 분노는 우리를 분리시키지만 웃음은 우리를 한데 묶어 준다”고 지적했다.
삶의 덧없음과 가벼움에 대한 인식은 우리 삶이 기본적으로 우연성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이데올로기에 충만한 사람에게 우연이란 없으며 모든 것은 ‘역사적 필연’에 의해서 결정된다. 종교적 신앙심에 가득 찬 사람에게도 우연이란 없으며 모든 것은 ‘신의 뜻’에 따른 필연이다.
인간의 이성에 무한한 확신을 보내는 과학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 역시 우연이란 아직 우리가 모르는 것에 불과할 뿐이며, 모든 것은 ‘과학적 이론과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와 신념은 참으로 무거운 것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괴롭고 답답하다). 그러나 우연은 참으로 가벼운 것이다. 역시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짜릿하고 즐겁다).
우리 삶은 우연에 포위되어 있다. “우리의 일상은 우연의 폭격을 받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흔히 우리가 우연의 일치라고 일컫는 인간과 사건 간의 우연한 만남으로 점철된다.” (밀란 쿤데라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우연을 참기 힘든 것으로 받아들인다. 모든 사물과 사건에 이야기를 부여함으로써 의미를 찾으려는 우리에게 우연은 무의미해 보이며 무엇보다 너무 가벼워서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불쾌하기까지 하다. “취리히에서 프라하로 돌아오는 도중 토마스에게는 자기와 테레사의 만남이 여섯 번의 거의 불가능한 우연에 근거했다는 생각에 일종의 불쾌감이 들었다.”(밀란 쿤데라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렇게 참기 힘든 우연에 직면하여 인간은 여기에 인과관계와 연속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또한 인간의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의 양식이기도 하며, 우리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방식의 대표적인 한 예가 과학이다. 한 시대의 과학이라는 이야기 틀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인과관계가 곧 과학적 지식이며, 과학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러나 일정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강한 인과관계의 힘을 발휘하는 신화가 바로 미신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세계에 대한 수학적·객관적 지식화의 가능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지난 세기에, 우연은 곧 무지에 대한 자인과 동의어였다. 뉴턴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결코 우연히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으며(그는 돈독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러한 확신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 준 하나의 신화 -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 를 ‘이야기’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오늘날 새로운 과학은 더 이상 우연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불확정성의 원리의 양자역학은 우연성에 대한 인식을 최고의 과학적 지식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우연성에 대한 인식은 양자역학에만 국한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고분자 생물학자인 자크 모노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200개의 아미노산 잔기(殘基)를 가지고 있는 단백질에서 아미노산 잔기의 배열 순서를 199개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하더라도, 아직 분석에 의해 구명되지 않고 남아 있는 하나의 단백질 잔기의 성질을 예측할 수 있는 이론적, 또는 경험의 법칙을 세우기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이 단백질 구조는 임의적인 것이다…(이것은) 어쩌면 무지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고백하는 것처럼 들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정반대다. 그것은 도리어 사실의 본성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모노에 따르면, 생명체는 인공물과는 달리 외부적인 프로젝트나 미리 규정된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생체의 합목적성이나 진화의 방향은 (따라서 인간의 역사는) 헤겔이나 다윈이 생각하듯이 미리 결정된 것도 아니고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도 아니다. 모노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미시적 세계의 교란 원인으로 제시하면서, 미시적 세계의 교란이 바로 진화의 원동력이라고 한다. 진화는 돌연변이가 자연 도태되는 과정에 나타나며, 돌연변이는 미시적 세계의 우연적인 교란에 의해서 일어나는데, 이러한 불확정성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은 물질의 양자적 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은, ‘본성에서부터 본질적으로 예견 불가능한’ 즉 우연적인 사건인 것이다. 자크 모노의 주장은 한마디로 필연적으로 보이는 거시적 사건의 미시적 기반은 결국 우연적 사건들이라는 것이다. 우연적인 자그마한 사건들이 쌓여서 필연적인 것으로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인생에 필연은 없고 모든 것이 우연이니, 얼마나 덧없고, 가볍고, 허(虛)하고 무(無)한가!
중세의 예수 모습을 담은 수많은 그림 중 예수가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은 단 하나도 없다고 한다. 웃음은 경박스럽고 천한 것이기에 존중심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웃음에 대해서만큼은 우리는 아직도 중세를 살고 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근엄하고 엄숙함만을 존중하며 웃음에 대해서는 존중할 줄 모른다.
대중문화의 총아인 텔레비전을 잠시 생각해 보자. 텔레비전의 텍스트는 크게 보아 뉴스, 드라마(픽션), 오락물, 다큐멘터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중 프로그램 시청자나 제작자들이 가장 신뢰하고 존중할 만한 것으로 떠받드는 것이 바로 객관적 사실 보도를 지향하는 뉴스다. 그렇기 때문에 뉴스 진행자들은 웃어서는 안 된다. 딱딱하게 굳은 엄숙한 표정으로 ‘객관적 사실’을 보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심각한 얼굴로 이성적인 논쟁을 벌이는 시사토론 프로그램은 수준 높고 교양 있는 프로그램으로 대우받는 반면, 상대적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오락물이나 코미디 프로그램은 수준 낮은 것으로 천대받고 있다.

여기서 ‘수준 낮음’이란 이성주의에 대한 신봉의 결과물일 뿐이다. 사실 우리나라 텔레비전 코미디가 수준이 낮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곧 우리 문화의 웃음에 대한 존중의 정도가 반영된 것뿐이다. 코미디 제작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깔보는 풍토에서는 진정 유능한 작가나 연출자 연기자들이 코미디로 몰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코미디의 수준을 높이려면 웃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바꿔야 한다. 이러한 웃음과 가벼움에 대한 감수성의 문화적 변혁은 어쩌면 이 시대의 미술이 담당해야 할 문화적 소명인지도 모른다.

 
 
 
김태헌 <화난중일기>

1990년대까지만 해도 웃음이나 가벼움을 정면으로 다룬 미술 작품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무거움과 진지함을 조롱하고 웃음을 소재로 하는 일련의 작품들은 웃음과 가벼움이 21세기 미술의 키워드로 자리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예컨대 얼마 전 조습의 <난 명랑을 보았네전>은 권위주의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종교에 대한 희화화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무거운 종교에 정면으로 대항해 웃어 보려는 ‘종교를 웃게 하고 종교로 하여금 웃게 만드는’용기 있는 시도라 할 만하다.
권력의 얼굴은 항상 엄숙하고 근엄하다. 권력을 맹목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도 권력자를 흉내내 항상 진지하고 굳은 표정을 지으려 노력한다. 권력을 근본적으로 해체하고 전복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것을 조롱하고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일이다. 웃음과 농담에 기반한 저항과 변혁이 가능한가? 가능하다. 농담에 기반한 저항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전수현의 <공화국>과 <거짓말이야> 등의 애니메이션과 비디오 작업들이다.

전수현은자신의온라인전시실(http://www.neolook.com/jsh/index.htm)에서 자신을 ‘하꼬방 스튜디오 총재’라고 칭하며 ‘가방끈 : 존나 짧음’이라하여 학벌 위주의 권위주의를 비꼬고 있다. 웃는 얼굴의 저항인이라 할 만하다.

이 밖에도 김태헌의 <화난중일기도>의 일련의 작품이나 노석미의 애니메이션 <샤워> 등도 웃음과 가벼움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의 지평을 열어 가고 있다. 구시대 정치이데올로기로 가득 찼던 여러 가지 포스터 양식을 패러디하여 우리 시대를 풍자하는 현태준의 <엉망진창세상만세> 포스터 시리즈 역시 즐거운 웃음을 유발한다. 2000년 새로운 예술의 해 폐막제 <닫으며, 열며전>에 출품된 일련의 작품들이(김준의 <장미클럽>, 이우일의 <김치>, 김주호의 <근데 말이야> 등) 가벼움과 웃음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젊은 작가들의 웃음과 가벼움에 대한 긍정적이고도 열린 태도는 우리 미술계의 앞날을 분명 밝게 해주리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