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 선인장, '선인장': 하이데거와 함께 작품 읽기

ART 2000년 6월호 > FOCUS

정서영展 2000. 3. 17.~5. 14. 아트선재센터

 
<무제>
 

“진리의 작품 가운데로의 자기 정립으로서의 예술은 시작(詩作)이다.... 왜냐하면 작품이 작품으로서 현실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들이 우리들 자신의 본질 자체를 존재자의 진리 가운데 세우기 위하여 일상성을 떠나 작품에 의해 열려진 곳 가운데로 들어 설 때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본질은 시다. 또 시작(詩作)의 본질은 진리의 수립(Stiftung) 이다.... 모든 창작(Schaffen)은 길어냄(Schofen)이다.” - 하이데거, <예술작품의 근원>

전시장 입구에는 작은 선인장 화분이 놓여 있다. 그러나 왠지 좀 이상하다. 다시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진짜 선인장이 아니다. 작은 화분 모양의 시멘트 덩어리 위에 선인장처럼 생긴 꽃꽂이용 스티로폼이 얹혀져 있을 뿐이다. 그것은 선인장이라 이름 붙여져 있다.

이 선인장은 (사물을 신체로부터 분리시켜 너무 먼 곳에 둔 해석이라 하여 하이데거가 비판하는) “특징들의 수용체로서의 사물”도 아니고 (사물을 지나치게 우리의 신체 곁으로 밀어부치는 해석이라 하여 역시 하이데거가 비판하는) “감각대상으로서의 사물”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물 자체가 자신의 자족성 가운데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는 “형상화된 질료로서의 사물”이다.

 
 
왼쪽 : <선인장> 오른쪽 위 : <전망대>, <꽃> 오른쪽 아래 : <카펫>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물은 의미라는 단단한 껍질로 코팅되어 있다. 예컨대 우리가 “책상”이라는 물건을 책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을 일단 순수한 하나의 사물로 받아들이고 난 후에 그것의 여러 가지 물적 특성 (나무와 쇠붙이로 만들어져 있고 이러저러하게 생겼다는 사실)을 파악해서 그것을 “책상”이라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생활세계가 부여하는 특정한 상황적 맥락 속에 존재하는 특정한 사물을 “책상”이라 이해한 연후에야 비로소 그 책상이 제공하는 여러 가지 특성을 파악해 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정서영의 <선인장>을 우선 선인장으로 받아들인 다음에 그것의 물적 특성을 살펴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의 물적 특성은 그것이 선인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준다. 바로 이것이 정서영의 작품들이 주는 혼란과 즐거움의 근원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사물의 존재 양식에는 물적현전 (bodily presence), 텅빈의도 (empty intending), 그림사물 (picture-thing)이라는 세 가지 형태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세 가지 형태의 존재 양식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 조셉 코서쓰의 “하나의 그리고 세 개의 망치들”(1965)이다. 이 작품은 하나의 망치 자체 (물적현전), 그 망치의 사진 (그림사물), 그리고 망치라는 단어의 사전적 설명 (텅빈의도)이라는 세 가지 존재 양식을 나란히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정서영의 <선인장>은 이러한 세 가지 형태의 존재 양식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정서영의 작품들의 독특한 점이다.

우선 <선인장>이라는 작품은 하나의 사물이기 때문에 “텅빈의도”라 할 수는 없다. 그 <선인장>은 선인장으로서의 물적 특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물적현전”으로서의 선인장이라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어떤 것을 지칭하는 기호로서의 “그림사물”인 것도 아니다. 예컨대 뒤샹의 변기는 “샘물”이나 혹은 다른 어떤 것을 지칭하는 기호로서 기능하지만 정서영의 <선인장>은 자기 자신만을 지칭하고 있을 뿐 다른 어떤 것도 지칭하지 않는다. 즉 자기 완결적인 존재로서의 “자기지칭 (self-reference)”인 셈이다.

<선인장>뿐만 아니라 <전망대>, <수위실>, <카펫>, <스포츠식 꽃꽂이> 등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지칭할 뿐이다. 만일 나선형의 탑 같은 모양의 <카페트>를 “바벨탑”이나 “초원위의 사원” 등으로 이름 붙였더라면 그것은 마치 하나의 기호이거나 상징이기를 원하면서 다른 무엇인가를 지칭하려 하는 레디메이드나 누보레알리즘 계열의 작품들과 별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뒤샹의 “샘물”은 샘물인 것이지 결코 변기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정서영의 선인장은 그저 선인장일 따름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도구와 예술작품은 모두 “만들어진 것”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도구의 본질은 그 용도성에 있다는 점에서 예술작품이 갖는 자족성을 결하고 있다. 순수한 예술작품은 무목적적인 성격을 그 특징으로 하며 어떠한 용도성도 갖지 않아야 한다. 하이데거가 지적하고 있듯이, 예술 작품은 “미적 가치가 덤으로 첨가되어 있는 도구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얼마나 많은 미술작품들이 특정한 용도성을 위해 제작되고 있는가? 우리는 아마 이러한 것들을 “도구적 미술작품”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정서영의 작품들은 어떠한 용도성이나 도구성도 갖지 않는 자기 완결적인 사물이다. 그것은 “만들어진 사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생적인 자연적 사물처럼 즉자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지칭하며 존재의 순수한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

정서영의 작품들은 그 적절한 “이름 붙이기”에 의해서 완성된다.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밝히고 있듯이,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곳, 즉 돌이나 식품이나 동물의 존재 가운데는, 존재자의 개시성은 없다. 존재자의 개시성은 “언어가 존재자를 명명(命名)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건물을 짓고, 조형 작업을 하는 것도, 이러한 말함과 명명이 여는 곳에 의해 지배를 받고 인도된다. 회화도 건축도, 진리가 작품 가운데로 자기를 지향시켜서 정돈하는 독특한 도정이며 방식이고 따라서 존재자의 내부에 깃들여 있는 독특한 시작(詩作) 행위이다.

“작품의 사물적 현실성에 대한 규정에 이르는 길은, 사물을 통과해서 작품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작품을 통해서 사물에 이르게 된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의 타당성은 바로 정서영의 작품들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하나의 <선인장>을 통해 우리는 “사물의 본질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저 낯섬과 폐쇄성”에 직접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