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대한, 몸을 위한 새로운 미적 감수성의 지평

ART 2000년 4월호 > NEW VISION 30대 이론가 7인의 발언

우리 시대의 미술은 이제는 '혼자-말하기'를 그만두고
'같이-말하기'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해야 한다.

혼자-말하기의 틀을 빠져나와 자신이 몸담고 있던 패러다임 혹은 장르를
새롭게 다시 구성해야 한다.

미술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미술은 이미 존재하는 것,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것, 이미 주어지고 고정된 것들을 모두 떨쳐 버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미술이 아니다. 미술은 현재 인간을 규정하는 모든 가치와 규범과 통념에 도전하여 새로운 미적 감수성의 지평을 엶으로써 인간이라는 존재를 새롭게 정의해 나가는 작업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 시대의 미술은 그 시대가 인간을 어떻게 정의하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며, 내일 우리 삶의 모습이 어떠할 것인가는 오늘의 미술에 나타나 있다.

나는 우리 시대의 미술이 몸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의 지평을 열고 몸을 중시하는 세상을 일궈내기를 바란다. 미술이나 현대 철학에 있어서 몸의 중요성은 이미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몸에 대한 많은 담론들이 그저 욕망이나 성의 문제 등 몸의 극히 제한적인 측면만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몸의 근본적 중요성을 축소시키거나 왜곡하고 있는 듯하여 안타깝다. 얼마 전 출판된 몸의 대한 담론을 묶어 놓은 책의 제목도 <몸-욕망의 사다리>였다. 몸이 중요한 것은 몸이 성욕의 발상지거나 "욕망의 사다리"여서가 아니다. 물론 욕망이나 감각도 중요하다. 그러나 몸의 중요성은 보다 더 근본적이다. 몸이 중요한 것은 인간의 모든 문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화적 사회적 활동의 근원이 몸이며, 우리가 창조하는 모든 문화적 생산물과 문명 전반에 몸이 투영되어 있다.

먼저 내가 지금 두드리고 있는 이 컴퓨터 자판을 보자. 왜 컴퓨터 자판은 이렇게 생겼으면 이만한 크기를 갖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 손과 손가락 때문이다. 즉 컴퓨터 키보드는 바로 우리 손과 손가락의 모양과 크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 눈앞에는 모니터가 있다. 그것은 키보드 윗부분에 놓여 있다. 바로 내 눈이 내 손보다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내 눈이 뒤통수에 달렸더라면 모니터는 내 뒤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니터가 존재하는 이유는 내 눈이 감지할 수 있는 가시광선을 뿜어내기 위해서다.

내가 앉아 있는 의자와 책상도 우리 몸의 형태를 반영하고 있다. 만약 우리의 몸이 코끼리처럼 생겼더라면 우리는 전혀 다른 크기와 모양의 책상과 의자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내 연구실의 방문은 왜 도 저렇게 세로로 길죽하게 생겼는가? 바로 우리가 서서 걸어다니기 때문이고 또 우리의 키가 저만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악어처럼 기어다니는 종족이었더라면 문은 낮게 가로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창문의 위치와 크기도 우리의 몸과 눈의 위치를 반영하고 있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건물 자체가 온통 우리 몸을 반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동차의 핸들이나 좌석, 백미러, 페달의 위치와 생김새 등에는 물론, 그러한 자동차들이 다니는 도로에도 우리 몸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건물과 도로 등으로 이루어진 도시 전체에가 우리 몸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몸은 우리 문명의 근본적 기반이다.

데카르트 이래의 근대 서구 철학은 몸과 정신을 둘로 나눠놓고 정신만이 인간성의 본질이라 보았다. 그러나 니체의 짜라투스트라가 “몸의 경멸자들”을 경멸한 이후, 메를로퐁티는 “나는 나의 몸이다”라고 단언하기에 이르렀다. 즉 우리의 몸은 우리를 구성하는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이 곧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며, 인간성의 본질은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몸에 있다는 것이다. 니체가 강조하고 있듯이 정신이 오해려 우리 몸의 일부이며 몸은 항상 정신에 선행한다.

타인은 타인의 몸으로 내 앞에 나타나며 나는 나의 몸으로 타인 앞에 나타난다.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이 세상에 관여하며 세상의 일부가 된다. 그렇기에 정화열은 몸이 곧 사회성의 기반이라 하고 있다. 몸이야말로 커뮤니케이션의 기본 전제 조건이며, 커뮤니케이션은 마음과 마음 사이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몸과 몸 사이의 문제이다.

세상을 뒤바꿔 놓고 있다는 디지털 미디어도 결국 몸 친화적인 미디어로 발전할 것이다. 마샬 맥루한이 지적한 것처럼 미디어는 결국 인간 몸의 확장이다. 카메라는 눈의 확장이며 스피커는 귀의 확장이다. 엠아이티 미디어 랩의 “만질 수 있는 미디어" (Tangible Media) 프로젝트 연구팀은 컴퓨터의 주된 장소가 책상위로부터 몸으로 이전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즉 데스크 탑 컴퓨터는 사라지고 우리 몸에 부착하는 입는 컴퓨터 (wearable computers)나 아예 우리 몸이나 피부 속에 이식하는 컴퓨터가 보편화되리라는 전망이다.

우리가 항상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별로 불편을 느끼지 않는 구두 밑창을 컴퓨터를 만드는 ”컴퓨터 구두“는 이미 완성되었다. 모니터는 선글라스같은 안경에 더블 비전으로 화면을 투사하는 방식은 이미 오래전에 완성되었고 이제는 망막의 시신경에 직접 빛을 쏘아 시각정보를 전달하는 기술까지 개발되었다. 이미지 없이 이미지를 직접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데이터 입력을 위해서는 손가락 마디 부분마다 작은 키가 달려 있는 장갑처럼 생긴 키보드가 이미 개발되었다. 하지만 요즘 빠르게 진척되고 있는 음성자동인식 장치들은 조만간 키보드를 아예 사라지게 할 것이고 우리는 컴퓨터와의 대화를 통하여 데이터 입출력을 하게 될 것이다. 머지 않은 미래에 우리는 여러 개의 작은 컴퓨터를 몸 여기 저기에 지니고 다니게 될 것이며 그것은 독자적인 IP 주소를 갖고 인터넷에 무선으로 연결될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의 빠른 발전은 모니터 중심의 시각 우월적 커뮤니케이션에서 청각과 촉각 나아가 후각까지 포함하는 다중감각적 매체를 보편화시키고 있다. 다중감각적 디지털 미디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발전 방향은 가상현실 (Virtual Reality)또는 원격현전 (telepresence)이다. 가상현실은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지각의 장 (field of perception)"으로서의 몸을 전제로 한다. 완벽하게 몸 친화적인 매체만이 완벽한 가상현실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은 디지털 미디어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게 되겠지만 오히려 미술은 디지털 미디어 기술의 바람직한 발전 방향을 제시하려는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기술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처음 발명자의 의도대로 사용된 기술은 거의 없다. 이는 기술의 의미가 처음부터 내재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후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인터넷 등의 디지털 미디어 기술은 사용자들인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디지털 미디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그것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는 결국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이고, 어떠한 삶이 좋은 삶이며, 어떠한 세상이 살만한 세상인가 하는 가치 판단의 문제와 직결된다.

신의 죽음 이후 가치 기준의 혼란이 심화되었다고 하지만 몸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최후의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몸에 좋은 것이 좋은 것이고 몸에 나쁜 것이 나쁜 것이다. 모든 것을 인간의 몸을 위해서 봉사하여야 하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된다. 핵무기, 환경 공해, 폭력, 전쟁, 지뢰, 총기, 교통사고, 비합리적인 의료 서비스 등 우리 몸을 위협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

우리는 어느새 몸의 파괴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감각해져 있다. 예컨대 몸의 노출에 불과한 소위 “음란물”에 대해서는 호들갑을 떨면서 과민반응을 보이면서도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때리고, 폭발시켜 죽이는 영화나 뮤직비디오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무감각하다. 해롭기로 따지자면 노골적인 성교 장면보다 사실적인 살인 장면이 더욱 더 해로울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인간의 몸을 파괴하는 폭력은 흔히 자신의 진리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데, 종교적 신념이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인간만이 자신의 신화적 믿음에 기반하여 다른 인간을 자신있게 죽일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그리고 오늘날 지금 여기서도--우리는 신념 때문에, 신념에 기반하여 서로 죽이고 죽는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마지막 부분에서 윌리엄 수도사는 이렇게 타이르고 있다.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조심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하고 진리가 웃게하는 일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리가 아니겠느냐?”

정화열 역시 바흐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위대한 것에는 반드시 웃음이 담겨있다.” 우리는 웃음 없이 심각한 얼굴로 하는 모든 이야기를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엄숙한 목소리로 진리를 이야기하는 자세에는 항상 폭력의 그림자가 서려있다. 반대로 웃음은 몸의 파괴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독단론대신에 서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같이-이야기하기의 변증법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변증법은 어원론적으로 같이dia-말하기lectic이다.)

나는 우리 시대의 미술이 이제 혼자-말하기를 그만 두고 즐겁게 “웃으며 같이 이야기하기”의 전통을 시작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정화열의 말처럼 “내가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과 아무도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모두 부정하고 제 3의 길을 택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같이-말하기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해야한다. 혼자-말하기의 틀에서 빠져나와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패러다임 혹은 장르를 재구성해야한다. “장르를 재구성하는 것 (re-genre-ation)”은 곧 새롭게 다시 사는 것, 즉 “갱생 (regeneration)”이다. 새로운 장르에서의 이야기(작업하기)는 말하는 이(작가)와 듣는 이(관객)와의 같이 어우러짐을 전제해야하며, 이는 곧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우리”를 향해 함께 추는 춤이어야한다. 즐겁게 웃고 떠들며 함께 춤 출 때 우리의 몸은 건강해질 것이고 심각한 얼굴로 우리 몸을 파괴하려는 폭력은 점차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