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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2000년 4월호 > FOCUS

이미지 미술관展 2000. 3. 4.~14. 문예진흥원 미술회관

<이미지 미술관>전은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의 기획 공모전 당선작답게 전시 기획자의 의도가 뚜렷하고도 일관되게 드러난 흔치 않은 전시다. <이미지 미술관>은 하나의 가상 현실 (Virtual Reality) 미술관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문예진흥원 미술 회관이라는 진짜 미술관 안에 가상 현실로서의 또 하나의 미술관이 들어앉아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전시는 많은 작품이 출품된 단체전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이미지 미술관>이라는 단 하나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 기획자 이근용의 개인전이라 하는 편이 차라리 더 정확할른지도 모른다.

미술 작품은 전통적으로 일정한 지시 대상을 갖는 재현물(representation)이다. 그런데 <이미지 미술관>에 출품된 작품들이 지시하는 바는 이미 사회적 제도로서 굳어져버린 유명한 미술 작품들이고 (따라서 메타 미술이다), 크게 보아 이 전시 자체도 제도로서의 미술관을 지칭하고 있는 메타 미술관이다. 홍순명의 <문>이 하나의 전시 작품인지도 깨닫지 못한 채 (사실 굳이 알 필요도 없다) 그 <문>을 통해 이 메타 미술관에 들어서게 되는 순간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가상 미술관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이미지 미술관>에서 관객은 진짜 미술관에서처럼 작품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그저 작품을 “감상”만 할 수는 없다. 작품을 자신의 그림자로 가림으로써 숨은 그림을 드러나게 하거나 아예 작품의 일부가 되어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김창겸), 또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오히려 자기 자신을 “관람”하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기도 하면서 (김상우), 관객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의 관객, 즉 메타 관객이 되고 결국 <이미지 미술관>의 한 부분으로 편입된다.

<이미지 미술관>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제1전시실에는 대체로 미술 작품의 패러디가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 입구에 들어서면 좁고 긴 복도가 나타나는데 그 벽에는 슬라이드 프로젝터가 권위있는 명화의 아우라를 일그러뜨리며 비춰주고 있다 (박지아). 복도를 지나가는 관객들은 항상 멀리서 경건하게 쳐다보기만 했던 명화의 이미지를 자연스레 자신의 그림자로 부정하며 지나가게 된다.

왼쪽 : 홍순명<문> 오른쪽 : 박지아<불명확한 존재>

김창겸의 <반고흐에 대한 경의에 대한 경의 II>에서도 관객은 고호의 자화상 속에 숨겨진 “진짜” 그림을 찾아내기 위해 환영의 원천인 슬라이드 프로젝트의 빛을 온몸으로 막아내야만 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어느 선사의 말처럼 위대한 고호의 이미지를 미천한 우리 몸의 그림자로 감히 불경스럽게도 부정해야만 우리는 본래 모습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양만기의 <터널 뮤지엄>은 경건한 제단 위에 올려져 있다. 계단을 올라 그 밀실 같기도 하고 좁은 골방 같기도 한 터널에 들어서려면 우리는 몸을 한껏 꾸부려 겸손해져야만 한다. 그 터널은 하이퍼텍스트로 가득 차 있는 작은 도서관이다. 펼쳐져 있는 책에는 비디오 이미지들이 빠르게 넘어가고 있다. 굳이 손을 들어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도 역사적인, 정치적인, 또는 야한 포르노의 이미지가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우리는 이 골방같은 터널에 몰래 숨어서 세상을 내다보며 우리의 관음증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반대편 계단을 통해 세상으로 내려간다.

박혜성의 비디오 작업은 마그리트의 <골콩드>와 <신문을 읽는 남자>를 패러디한 것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흉내내기 차원의 패러디가 아니다. 박혜성의 비디오는 마그리트의 작품들에 하나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부여한다. 어떻게 하늘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둥둥 떠다니게 되었는지와 어떻게 신문 읽는 남자가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는지를 박혜성은 비디오에 몸소 출연하여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리하여 박혜성의 비디오를 보고 난 뒤의 우리 눈에는 마그리트의 그림들이 박혜성 비디오의 마지막 장면처럼 보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제 마그리트의 그림을 볼 때마다 박헤성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박혜성의 비디오는 패러디 하는 것과 패러디 되는 것의 자리를 뒤바꿔 놓는 이야기 (서사)의 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제2전시실은 아트숍이나 휴게실, 화장실 등 미술관의 부대시설의 패러디인데 전체적으로 보아 기호로서의 상품을 다루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홍지연의 “장난감 가게”인 <Millennium Fantasy>는 제2전시실에 더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이다. 주위를 한 번 둘러 보라.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상품이거나 한 때 상품이었던 것이다. 자연적 물질과 사회적 의미의 결합인 상품은 내가 생산한 것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항상 광고 (커뮤니케이션)와 디자인, 브랜드 네이밍 등 (의미 부여)이 요구된다.

상품 홍보 이벤트를 패러디한 이돈순의 <진실투표>나 수퍼마켓을 패러디한 수파티스트의 <W. C. Artshop>은 모두 기호로서의 상품과 기호로서의 미술작품의 경계를 묻고 있다. 더욱이 김지현의 <미디어 홈 쇼핑>은 홈 쇼핑 채널의 포맷을 패러디하여 작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광고하고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미술의 작품성과 상품성을 동시에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미지 드링크 자판기>다. 이것은 분명 전시 작품이 아니다. 만들었다는 작가도 없고 전시 작품 목록에도 나오지 않는다. 돈을 넣으면 음료수가 나오는 단순한 음료수 자동 판매기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작품이 아닌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미지 미술관>의 의도를 압축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훌륭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자동판매기가 판매하는 음료수 캔은 <이미지 미술관> 전시 작품들의 이미지를 하나씩 담은 스티커로 둘러싸여 있다. 이 스티커들은 메타 미술의 이미지, 즉 굳이 말하자면 미술작품의 “이미지의 이미지의 이미지”인 셈이다.

목마른 관객은 자신이 감상했던 작품의 이미지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선택 버튼을 누르면 된다. 그러나 관객이 마시게 되는 그 음료수는 더 이상 상품이 아니다. 비록 그 음료수의 물질적 측면은 전혀 바뀌지 않았지만 그것은 상품 디자인과 브렌드 네임을 박탈당함으로써, 따라서 그것이 연상시킬 수 있었는 광고의 효과마저 상실해 버림으로써, 하나의 상품으로서의 사회적 의미를 잃게된 것이다. 그 의미의 빈 자리를 <이미지 미술관>의 작품 이미지들이 채우고 있다. 따라서 관객은 상품이 아니라 작품 이미지로서의 음료수를 마시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미지 드링크 자판기>는 미술 작품과 상품의 경계를 넘나드는 걸작이다. 지금도 내 책꽂이 위에는 <이미지 드링크 자판기>에서 꺼낸 3개의 음료수 캔이 놓여 있다. 나는 지금도 내가 마셨던 음료수가 콜라였는지 사이다였는지 조차 모르는데,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루자 (이수경)의 퍼포먼스 <미술가 제복>이 추구하는 상호작용성은 다른 많은 작가들이 추구하고 있고 또 <이미지 미술관>의 여러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관객 참여“의 상호작용성과는 성격이 다르다. 예컨대 이중재의 <Click the Money>나 김흥국의 <퍼즐>은 모두 작품과 관객간의 상호작용성에 초점을 맞춘 것들이다. 그러나 설문조사를 통해 만든 <미술가 제복>을 많은 사람에게 입혀 놓고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무엇인가를 이뤄내자”라고 외치는 이수경은 작품과 관객보다는 오히려 작가와 관객간의 직접적인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성을 추구하고 있다. 수년간 옷을 소재로 한 작업에 천착해 왔던 이수경은 <미술가 제복>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보다 분명히 이야기하는 법을 터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으로보아 <이미지 미술관>은 밝은 농담이며 환한 웃음이다. 한수정의 <그림자로 보기>, 이상준의 <미술회관>, 최진선의 <인큐베이터>와 <병풍>은 물론 다른 작품들도 모두 웃으며 즐겁게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바흐찐은 “모든 위대한 것에는 반드시 웃음이 담겨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심각한 얼굴로 하는 모든 이야기를 두려워해야 한다. 엄숙한 목소리로 진리를 이야기하려는 자세에는 항상 폭력의 그림자가 서려있다. 바흐찐이 말대로 폭력의 가장 큰 특징은 “웃음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흐찐이 이야기하고 있는 웃음은 “웃는 웃음 (laughing laugh)” 이며, 즐겁고 열린 웃음이다. 이것은 냉소적이고 부정적이며 닫혀있는 비웃음과는 다르다. 비웃음은 비(非)웃음이다. 정화열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심각함과는 달리 웃음은 우리를 고양시키며 해방시킨다. 바흐찐이 옹호하는 웃음은 모든 사람과 전체 세계에 울려 퍼지는 사회적이면서 함께 합창하는 형태의 웃음이다. 분노는 우리를 분리시키지만 웃음은 우리를 한데 묶어준다.”

<이미지 미술관>에서 나는 우리 미술계가, 나아가 우리 사회가 심각한 얼굴로 엄숙한 진실을 진지하게 탐색하려는 지난날의 무거운 억눌림에서 벗어나 즐겁게 웃으며 함께 이야기하는 열린 자세를 지니기 시작하였음을 본다. <이미지 미술관>이 나의 공간과 너의 공간을 너머 우리의 공간을 이뤄나가는 “지금-여기서-함께-웃으며-작업하기” 전통의 시작이기를 기대해 본다. ■

 
  위 : 수파티스트 <W.C. 아트숍>
아래 : 제2전시실 전경. 한수정<그림자로 보기> 공동작업 <이미지드링크 자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