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의 느림과 느림의 속도, 그 반복의 변증법

ART 2000년 3월호 > Exhibition Review

느림展 2000. 1. 28.~3. 5. 아트선재센터

<느림전>의 원래 제목은 '속도의 느림'이다. 속도는 서로 다른 두 지점을 직선으로 이동할 때 필요한 시간의 비율이다. 따라서 속도는 거리, 시간, 운동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느 한 방향을 지향하는 방향성을 함축하고 있는 개념이다. 만약 한 사물(또는 사람)이 두 지점을 직선으로 움직이지 않고 꾸불꾸불 방황한다면, 혹은 방향성을 잃고 반복해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한다면 속도라는 개념이 적용될 여지가 없다.

대체로 서양 문명은 태초의 천지창조로 시작된 역사가 이 세상의 종말로 끝나리라는 단선적 시간 관념을 갖고 있었다. 서구 주도로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언제부터인가 우리도 역사와 시간은 일직선을 따라 흘러간다는 단선적 시간 관념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세계관은 삶의 목표를 향해 일직선으로 뛰어가는 달리기 시합 정도로 여기게 한다. 요즈음 유행하는 산업화에는 뒤졌지만 정보화에는 앞서가자는 식의 구호가 이러한 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느림전>의 미덕은 인생이라는 달리기 게임에서 우리를 순간적으로나마 탁 튕겨져 나가게 해주는 힘이 있다는데 있다. 그 힘은 반복에 대한 성찰에서 나온다. 세상은 빠르고 바쁘게 돌아간다. 그러나 우리네 삶의 본질은 직선운동에 있지 않다. 오히려 모든 것은 반복되고 되풀이되어 진다. 단지 그 반복됨이 빠를 뿐이다. 빠르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한 발짝만 비켜서서 우리네 삶을 되돌아본다면 그것은 대단히 느리다.

 
김수자 <이주-2727킬로미터 보따리 트럭>
김영진 <액체-두 종류의 점성>
박홍천 <앨리스에게>
 

김수자의 비디오 <심호흡>은 먼저 잿빛 하늘만을 지루하게 보여준다. 그 조용한 허공을 배경으로 해서 불현듯 나타나는 새 한 마리. 어느새 허공을 가로질러 스쳐 지나가듯이 사라진다. 그리고는 다시 나타났다가는 또 사라진다. 그리고 이것을 반복한다. 새는 아마도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날고 있었겠지만 그 비행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지루한 느림이다. 제목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불편듯 새가 나타날 떄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곤 했다.

최정화의 커다란 봉제 로봇 역시 거친 심호흡을 반복하고 있었다. 로봇은 숨을 몰아쉬며(에어 컴프레서의 모터 소리야말로 로봇의 숨쉬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아주 천천히, 기를 쓰며 일어나서는 잠시 주저앉아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그만 털썩 쓰러져 죽어버린다. 그리고 그것을 반복한다. 반복해서 죽음으로써 그 로봇은 영속적인 삶을 부여받는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는 것만이 생명체이기 떄문이다. 이 작품은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는 하나의 커다란 농담이며 슬픈 이야기다. 로봇이 잠시 일어나 앉았을 떄 생각한 것은 무엇일까? 물론 자기 삶에 대한 반성이었을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일어나려고 발버둥칠까 하는 회의. 그 회의는 아마도 로봇으로서 살아가야 할 삶의 무게를 깨닫게 했을 것이고 그 무게에 못 이겨 로봇은 다시 쓰러지고 만다. 말하자면 이 로봇은 쉬지 않고 성찰과 자살을 반복하고 있는 너무도 인간적인 로봇인 셈이다. 반면 <퍼니게임>의 모형 경찰관들은 멀리서 보면 살아 있는 진짜 경찰관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죽어 있는 인형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이 모형 경찰관들이야말로 자기 성찰이 없는 기계에 불과하고 오히려 자기 성찰과 죽음을 계속 반복하는 로봇은 극적인 인간성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김영진의 <부유-H로부터의 유기적 시선>은 프로젝터를 통해 글리세린 속을 천천히 떠다니는 필름 조각들을 보여준다. 그런데 작가가 고안한 이 프로젝터에는 작은 모터가 달려 있어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해서 글리세린을 휘젓고 있다. 모터가 움직이는 잠시 동안 글리세린 속의 필름 조각들은 빠르게 움직이다가 모터가 멈추면 한순간 천천히 전시장을 부유하는 그림자가 된다. 그리고 이것을 반복한다. 그런데 그 필름 조각들에는 일상의 언어가 씌여 있다. 언어의 파편들은 정면의 벽뿐만 아니라 천장과 바닥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운다. 천장과 바닥에서 움직이는 필름의 그림자들은 왜곡되어 보이고 정면 벽면에 비친 그림자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빨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둥둥 떠다니는 그림자 텍스트 한가운데에 문득 짙은 그림자가 보인다. 바로 관객인 나의 그림자다. 이 작품을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나(내 그림자)도 어느새 떠다니는 일상의 텍스트 그림자의 일부가 되고 만다. 빠르게 혹은 천천히 떠다니기 시작하는 텍스트의 파편이 되어버린 나의 그림자를 보고 나는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육근병의 <새벽>은 먼동이 터올 무렵의 풍경을 실시간으로 담은 지루하고 느린 비디오다. 그러나 그 느림은 엄청난 속도를 내포하고 있다. 30분 남짓 되는 시간 내에 밤이 낮으로 바뀌는, 암흑천지가 대명천지로 뒤바뀌는 그 장엄한 역사를 시시간으로 통째로 보여주고 있기 떄문이다. 그의 비디오에는 천지 개벽이 30분 안에 빠르게 압축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있어 밤이 낮이 되고 낮이 밤이 되는 것은 얼마나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인가? 그러나 그 순식간에 일어나는 천지 개벽을 비디오를 통해 한번 천천히 지켜보라. 얼마나 느린 것인가를. 24시간에 한 번 자전하는 지구는 과연 천천히 도는 것인가 아니면 무서운 속도로 돌고 있는 것인가? 이 작품은 속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느리고 또 느림 속에 엄청난 속도가 함축되어 있다는 속도와 느림의 변증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배병우의 <소나무> 연작 사진들 역시 꿈틀대는 소나무의 반복되는 림들과 움직임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고, 박홍천의 <앨리스에게> 역시 빠르게 돌아가는 놀이동산의 고요하고 정지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느림전>의 작품들이 함축하는 느림의 의미는 단순히 속도가 부족하다는 의미에서의 느림이 아니다. 다시 말해 어디론가 달려가는 데 있어 빨리 가지 않고 천천히 걷거나 기어간다는 의미에서의 느림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대단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우리 삶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투영하되 단지 그 방향성을 부정하고 반복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